논어 에세이, 빈빈

학운(學運)에 중독되다

류창희 2017. 2. 19. 11:48


욕파불능(欲罷不能)



욕파불능, 욕파불능(欲罷不能)은 금단현상이다. 끊으려고 해도 도저히 끊을 수 없는 경지다.

 


공자의 제자 안연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선생님의 도(道)는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견고하며, 바라봄에 앞에 있더니 홀연히 뒤에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차근차근히 사람을 잘 이끄시어 문(文)으로써 나의 지식을 넓혀주시고, 예(禮)로써 나의 행동을 요약하게 해주셨습니다. 공부를 그만두고자 해도 그만둘 수 없어 이미 나의 재주를 다하니, 선생님의 도가 내 앞에 우뚝 서 있는 듯합니다. 그리하여 따르고자 하나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顔淵 喟然歎曰 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 欲罷不能 旣竭吾才 女有所立卓爾 雖欲從之 末由也已 - 자한편)

 


학문은 하면 할수록 더 어렵다. 깊이 파고들어 갈수록 더욱 무궁무진하다. 거의 다 왔는가 싶다가도 다가가면 저만큼 멀어진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제자 안연이 우러러볼수록 하늘보다 더 높다며 스승 공자를 닮고자 하는 모습이 부럽다.

 

그날, 오전에 나는 남구 문화원에서 수업하고 칼국수 집으로 갔다. 그곳은 언제나 손님이 북적인다. 반찬 따로 밥 따로 집어 먹는 시간을 아끼려고 나는 김치 만두를 한판 시켰다. 전날 밤에 메일로 첨부해온 자료를 보고 있었다. 퇴고라는 것이 그렇다. 정신집중을 하고 그 사람의 삶 속에 끼어들지 않으면 할 수가 없는 작업이다. 숨 고르는 쉼표 하나도 그 사람의 상황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주문한 만두가 나오는 시간 동안, 글 속에 푹 빠져 빠른 속도로 빼고, 넣고, 줄 치고 연필 춤을 췄다. 옆 테이블 여인들과 눈이 마주쳤다. 얼떨결에 모녀지간으로 보이는 두 여인에게 목례했다. 옆의 사람도 그 옆 테이블의 사람들도 나를 보고 있다. 나는 혹시 아는 사람들인가 싶어 둘러보니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이다.

 

60대쯤으로 보이는 어느 부인이 내게 묻는다. 

“무슨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세요?”

“…”

“연세도 있으신데…”

‘연세(?)’, 나는 아직 연세가 아니라 나이다.

“대단하십니다.” 하며 덧붙인다. 참 좋아 보인다고 흉인지 칭찬인지 추켜세운다. 혀를 내두르는 모습에서 내 꼴의 정도가 얼마나 심했었나를 짐작했다. 시켜놓은 만두는 식어서 마르고 있다. 허구한 날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으면서 시간을 다퉈 하는 짓이다. 나는 멋쩍어 궁색한 변명을 했다.

 

“공부는 때가 있더라고요. 부모가 공부해라, 공부해라! 할 때, 안 했더니 지금 벌 받는 중입니다.”

우스갯말이라고 한마디 한 것이 찬물 한 바가지다. 이 꼴이 내게 뒤늦게 찾아온 손님 ‘학운’이다. 실제로 학교 다닐 때는 누가 나보고 공부하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어서어서 졸업하여 취직하기를 기다렸다. 나 같은 아이들에게는 공부도 사치였다.

 

아주 오래전 남편이 초임 직장을 택할 때, 시어머님은 나를 데리고 철학관에 가셨다. 남편의 사주를 넣었는데 사주 선생이 엉뚱하게 나를 지칭하면서 “이 며느리는 학운(學運)이 있다.”라고 했다. 그때 나는 매일 어른들 곁에서 걸레와 행주를 들고 진돗개 네 마리의 개밥이나 끓이는 새댁이었다. 그런 나에게 웬 ‘학운?’ 돌팔이 사이비라며 마구 마구 비웃었다. 교직은 남편이 택하는데, 나에게 ‘학(學)’이라는 글자는 터무니없는 단어였다.

 

나는 요즘, 부엌의 도마와 칼을 내려놓고 책과 칠판을 디자인한다. 해마다 새로운 장르를 하나씩 더하고 있다.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거창한 작업은 물론 아니다. ‘올해도 잘 살았구나’ 스스로 인정하며 기특하게 여기는 수준이다. 그 기특한 이름을 위해 매 순간 기를 쓴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철학관 사주 선생은 족집게 사주쟁이가 틀림없다. 

 

다시 욕파불능의 금단현상으로 돌아가 보자. 보통사람들은 일 년에 한 번 크리스마스나, 사월 초파일날이나 정월 초하룻날에 마음을 다잡고 인(仁)에 대한 실천을 한다면, 공자의 수제자 안연은 ‘삼 개월을 하루같이(三月不違仁) 밥 먹는 시간조차, 심지어 미끄러져 나자빠지는 순간에도 인만을 생각한다. 어디 요즘 학생들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입시다 취업이다 불쌍한가. 안연은 밤낮 공부, 공부, 공부만 하다가 서른 초반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그렇다. 나는 정말 운이 좋다. 안연처럼 공부하다 죽을 염려는 절대 없다. 이미 단명할 나이가 지났으니, 마음 놓고 공부해도 된다. 이 또한 복이 아닌가. 파릇파릇한 이팔청춘에 죽을 만큼 피를 토하며 아파도 보았고, 매운맛의 시집도 살아보았다. 왕년에 껌 좀 씹어봤다는 말이 있다. 나도 지난날 칡뿌리 좀 씹어본 덕분에 인생의 씁쓸한 맛도 기꺼이 즐긴다. 지나온 어려웠던 시간이 오히려 왕성한 에너지다. 지금 공부하여 대학 수능을 볼 것도 아니고, 고시에 합격하여 가문을 일으킬 것도 아니다. 더구나 부귀영화를 택할 나이는 더더욱 아니니 공부에 대해서만큼은 나는 온전한 자유인이다. 

 

무슨 공부든 마음만 먹으면 오래도록 할 수 있는 시간, 나는 지금 ‘능구(能久)’의 시간을 맞이했다. 곳곳에서 마주치는 모든 일과 사물 그리고 사람들, 그들은 내게 스승 아닌 것이 없다. 세상은 온통 욕파불능의 도가니다.






<<수필세계>> 2013년 여름 37권

<<논어 에세이 빈빈>> 2015



류창희 

http://rchess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