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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련 瑚璉 <구름카페 문학상 수상>

솔직하게

솔직하게

 

 

  덕으로 베푸는 일이 가능할까.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사랑으로 베풀라고 한다. 노장은 무위자연으로 자연스럽게 냅둬. 부처는 더 넓다. 무아無我의 경지다. 내가 없는데, 미움이 어디 있고 원수가 어디 있을까. 착하게 살면 천당 가고 악하게 살면 지옥 간다. 극락왕생과 지옥불은 인과응보다. 사후死後가 있는 종교다.

 

  혹자가 말하였다. 원한을 덕으로 갚는 것이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덕을 무엇으로 갚을 것인가? 원한은 정직함으로 갚고, 덕은 덕으로 갚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공자님은 사후가 없다. ‘지금 여기현재를 살아간다. 자로가 죽음에 대해 물었을 때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귀신섬기는 것을 물으니, 산사람이나 잘 섬기라고 한다. 멀리 가신 분을 위한 신종추원愼終追遠에 얽매이지 말고, 오늘 내 옆에 있는 사람, 내 가족, 내 이웃들과 조화롭게 생활하는 일상을 권한다. 가장 작은 단위, 너와 나에서 시작하는 관계의 미학이다.

 

  무엇으로 원한을 갚을까. 성정이 조급한 분들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열치열以熱治熱로 똑 같이 갚아주자고 덤빈다. 전쟁선포다. 그대가 내 코피를 터뜨렸으니까 나도 그대의 쌍코피정도는, 어쩌면 잠시 콧구멍이 시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625일을 기다렸다가 맨주먹 붉은 피로 갚으러 쳐들어갈까.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일제강점기의 설음을 아베총리에게 광화문 광장에 와서 우리 국민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라면 그가 행할까. 중국의 시진핑을 오라하여 청와대 춘추관 앞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씩 머리를 조아리라고 할까. 국제정세는 남북, 한일, 한중이 맞붙어 승부를 가리는 월드컵 축구경기가 아니다. 땅덩어리의 크기로 핵무기로 대적할 수 없다. 서로 고유한 방법과 문화로 협상하며 공존하는 지구촌이다.

 

  그래, 바로 그거다. 우리는 유일한 동방예의지국이니 의 측은지심을 무조건 발휘하는 것이 좋을까.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노래하다 아아~ 대한민국, 아아~ 나의 조국자랑스러운 나라가 되었다. 대외적으로 안팎이 정말 잘살고 있는 걸까. 혈세를 걷어 후덕하게 퍼주며 제발 평화롭게 좀 살자, 평화, 평화, 언제까지 아이 달래듯 할까. 언제까지 UN에게 치안정리를 부탁할까. 우리가 어려울 때 미국이 원조를 해줬으니, 막무가내 트럼프의 막말에도 고개 숙이며, 혹시라도 모를 무력도발을 막기 위해 방위비 분담금과 미국산 신무기를 자꾸 사야 할까. 그들은 평화라는 구실로 계속 부추기고 겁을 주며 뭐든지 비싼 값으로 우리에게 팔뿐이다. 인의예지仁義禮智 형 감각이 절실하다.

 

  집의 어머님은 친인척들에게 아주 잘 하셨다. 조실부모하여 형제가 없는 아버님께 시집와서 보리쌀 서 됫박으로 내외를 핍박했던 분들을 잊지 않으셨다. 취업을 못 해 힘들게 사는 조카에게 운전면허를 따도록 비용을 대주고, 번듯하게 입고 나갈 양복도 사주셨다. 조카뿐인가. 그의 자녀들이 학업을 마칠 수 있도록 등록금도 챙겨주고, 친정 조카딸이 어미 없이 시집을 가게 되면 폐백 음식까지 준비하셨다. 아기가 태어나면 미역국과 기저귀 포대기 배냇저고리를 싸 들고 가서 산바라지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나는 어머님의 며느리다. 대학생이던 신랑에게 시집와 아이를 낳았을 때도, 아이들이 중, 고등학교와 대학 입학할 때도, 며느리에게 손자가 먹은 분윳값까지 월부로 갚으라셨다. 부모가 책임감 있게 살아야 자식이 보고 배운다는 교훈이시다. 나중에 병원 침대에서만 생활하시면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따로 병실로 불러 베푸셨다. 기력이 아주 쇠하신 어느 날, “에미야, 얼추 다 갚았다며 한풀이 마무리를 하셨다. 그동안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부모들이 내쳤던 몰인정을 그의 자식들에게 덕으로써 갚아주셨다.

 

  은혜로운가. 공자께서는 원한은 정직함으로 갚으라고 하신다. 은 직량直諒이다. 바르고 성실하면 된다. 지공무사至公無私, 지극히 공평하여 사사로운 감정이 없게 하라신다. 덕으로 원한을 갚는 일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대줄 것이 아니라 아얏!” 아프다고 말해야 한다. 그것이 정직이다. 사람인데 어찌 증오의 감정이 없을까. 노자 도덕경에 원한이 있는 자에게 은덕으로써 갚으라報怨以德는 말은 아마도 앙갚음을 하지 말라는 뜻일 게다.

 

  나에게도 어디, 두고 보자괘씸한 옹치雍齒 몇 사람이 있다. 고까운 병통이다. 안보고 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정말 칸부치看不起하고 싶다. 못 본체 무시하며 모르쇠 할 만큼 배짱이 두둑하지 못한 나는 미운 마음을 아닌 척 상냥함으로 가린다.

 

  중국 명 말에 불화佛畵로 유명한 화가가 있었다. 그는 그림을 그리려고 할 때마다 반드시 목욕재계하였다. 그의 이름은 정중鄭重이다. 정중이 묘약이다. 우리는 산이 아니라, 돌멩이에 걸려 비틀거린다. 이제 나는 보은도 배은도 여력이 없다. 다만 자신에게 솔직하고 싶다. 그냥 그대로, 내 몸과 내 마음에게 우선 정중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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